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 2025-10-20 16:39:23
부산시립교향악단에서 25년 간 트럼펫 수석 연주자 자리를 지켜온 드미트리 로카렌코프(60)가 정년 퇴임했다.
드미트리는 1994년 내한 공연 때 처음 부산을 찾았고 곽승 전 부산시향 지휘자, KBS교향악단 수석 트럼페터였던 강바실리 선생 등과의 인연으로 2000년 부산시향에 입단했다. 당시 드미트리의 모친이 골수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러시아에서의 수입만으로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현실도 부산시향을 선택하게 된 또 다른 요인이 됐다.
2006년엔 동요 작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김형주 씨와 가정을 꾸렸다. 아들 하나와 유기묘 13마리가 그의 가족이다. 드미트리는 지난 16일 부산 남구 문현동의 스튜디오에서 기자와 만나 그 이야기를 들려줬다. 2002년 KBS부산에서 열린 창작동요제 리허설에서 아이들의 합창을 지휘하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 호감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다만, 부인 김형주 씨는 “젊었을 때 드미트리가 키도 크고 너무 잘생겨서 제가 쫓아 다녔다”고 반박했다.
드미트리의 국적은 러시아이지만 돼지국밥, 밀면, 갈비를 좋아하는 ‘뼛속까지’ 부산 사람이다. 그는 이날 인터뷰를 마친 뒤에도 기자와 함께 서면의 돼지국밥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드미트리는 “25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거의 모든 도시를 가봤는데, 부산이 가장 편안하고 좋다. 서울은 사람들이 많아서 부딪히고 힘들다”면서 “다른 나라나 도시에 여행이나 연주를 가면 빨리 (부산)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몇 년 전 길 잃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 보살폈는데, 정이 들어서 계속 키우게 됐고 그런 식으로 한두 마리씩 들여온 고양이가 이제는 13마리나 됐다고 했다.
드미트리는 지난 6월 부산시향에서 공식적으로 퇴임했지만 여전히 시향과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다. 아직 그를 대신할 만한 트럼페터를 찾지 못해 시향의 객원 연주자로 뛰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독일 베를린·뮌헨에서 열린 무직페스토 베를린과 무지카 비바 음악축제 때도 함께했고, 오는 23일 유엔창설 80주년 기념음악회에서도 그의 트럼펫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그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과 부산대 등에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으며, 대구시향·울산시향 등에서도 객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제자 두 명이 국제 콩쿠르에서 동시 입상해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부산예고 시절부터 가르쳐온 백도영과 손장원이 지난 8월 제주국제관악콩쿠르 트럼펫 분야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한 것이다.
드미트리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2000년 9월 입단 후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부산시향 정기연주회를 꼽았다. 트럼펫 연주자 출신인 곽승 예술감독이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었는데 탄탄한 실력과 엄격한 지도로 금세 자신을 부산시향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그때 헌신적으로 자신을 도와줬던 부산시향 단원들도 잊지 못했다. 매일 출근하면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집을 구하는데 동행해 주는 등 자기 일처럼 신경 써 주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특히 곽승 지휘자는 침대, 텔레비전, 냉장고, 전자레인지 같은 살림살이를 직접 챙겨줘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부산시향 금관5중주단을 이끌고 2018년 동아시아 문화도시 기획사업의 일환으로 찾은 중국 하얼빈 공연과, ‘찾아가는 음악회’로 학교나 기관 등을 방문했던 기억도 늘 새록새록하다. 부산시립예술단 조성일 팀장은 “부산시향의 유일한 외국인 단원인데 부산 사람들처럼 인정이 많고,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잘 들어주는 따뜻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며 “악기 실력뿐만 아니라 성품도 좋아서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믿고 음악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드미트리는 “부산시향이 ‘레벨 업’하기 위해서는 실전 연주회를 많이 해야 한다”면서 “빠듯한 일정 때문에 단원들이 힘들 수도 있지만, 연주를 하다가 안 하다가 하면 제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선배 음악가로서 따뜻한 조언을 했다.
1965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인근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드미트리는 여섯 살 때부터 트럼펫·호른 같은 관악기와 피아노를 공부해오다 14세 때 트럼펫 연주자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러시아 그네신 음악대학,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을 졸업한 드미트리는 국제 트럼펫 콩쿠르 3위에 입상하면서 ‘트럼페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후 러시아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 말리 주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모스크바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에서 트럼펫 수석을 지냈다.